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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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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따사로운 봄날, 청춘들의 곡괭이질[포도나무 아래서/신이현]〈51〉
작성자 농업회사법인 작은알자스 주식회사 충주지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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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0-04-14 14: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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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보기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여기 이렇게 대나무 꽂힌 자리에 곡괭이로 구멍을 파야 합니다. 30cm 정도 깊이로 파서 묘목을 구덩이에 넣어요.

 그 다음엔 금방 파낸 촉촉한 흙을 잘게 부숴서 충분히 덮어서 꼭꼭 눌러준 뒤 여기 이 귀리랑 보리를 베어서

 그 위를 수북하게 짚과 함께 덮어줍니다. 그 다음엔 이 보호 망사를 씌우면 됩니다. 아시겠죠?”

주말 포도밭에 여러 분들이 일손을 보태기 위해서 달려왔다. 레돔이 곡괭이로 구멍을 파고

 그 안에 포도나무를 심은 뒤 귀리와 짚으로 덮은 뒤 보호 망사 씌우는 것을 선보이자 모두들 “잘할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소리치며 곡괭이와 포도나무를 들고 흩어진다. 남자들은 손에 침을 탁탁 뱉은 뒤 기세 좋게 곡괭이질을 시작한다.

퍽퍽 땅 파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아이쿠 나자빠지는 소리를 낸다.

 “아아,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군요! 모두 몇 개의 구덩이를 파야 하는 거죠?”

“구덩이는 모두 1300개를 파야 합니다.” 레돔의 말에 모두들 비명 소리를 낸다. 설마 오늘 우리가 다 파야 하는 건 아니겠죠?

여기 돌이 있는 건 어떻게 하죠? 이 흙은 왜 이렇게 새카맣죠? 포도나무 뿌리를 적신 이 거무스름한 액체는 뭐죠? 소똥 증폭제라고요?

소똥인데 냄새가 좋군요! 이 포도 품종은 뭐죠? 쉬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이들은 와인을 좋아하는 도시의 청년들이다.

 다들 부드러운 손을 가진 세련된 직장인들이다. 농사를 지어본 적은 없지만 열정에 넘친다.

서툴게 곡괭이질을 하고 그 구덩이에 나무를 심을 때 모습은 엄마 가슴에 아기를 안겨주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무릎을 꿇고 한 그루씩 땅의 품에 나무를 심는 그 모습은 삶에서 몇 번 없는 성스러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있잖아요. 지금 심으면 포도는 언제 열리죠? 와인은 언제 마실 수 있죠?”

곡괭이질을 하다가 지치면 또 이런 질문들을 한다. 이렇게 조그만 나무가 언제 자랄까 싶은 모양이다.

 “이 나무에서 나온 포도로 와인을 마시려면 5년만 기다리면 돼요.” 레돔의 대답에 그들은 와, 하고 한숨을 내쉰다.

우리가 심은 나무에서 나온 와인을 마시려면 정말 오래 살아야겠다! 그때까지 별일 없이 잘 살 수 있을까?

당근 잘 살지 이 바보야! 풋풋한 청춘들이 와서 땅을 밟고 나무를 심고 한숨과 웃음소리를 내주니 밭에 행복한 기운이 넘친다.

이들이 모두 내 아들 딸이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젊은 일꾼들의 수를 세며 혼자 웃어댄다.

중참으로 지인의 메밀 빵과 수제 햄을 곁들여 시드르를 내놓으니 좋다고 달려온다.

이제 곧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복숭아나무 아래로 모여 장갑을 벗고 흙먼지를 털어낸다.

 멀리서 산새들이 지저귀고 봄빛이 그들의 볼과 손등에서 부서진다.

와인 뚜껑이 유쾌한 소리를 내면서 열리니 잔에 따르는 소리도 참 유쾌하다.

미래의 포도나무를 위해 건배를 하고 시원하게 한 잔 마시더니 또 한 잔을 더 마신다.

 메밀 빵은 너무 맛있고 햄도 너무 맛있다고 난리다. 한참 일했으니 시장하고 목이 말랐을 테지.

“오늘 심은 나무 한 그루에 다들 자기 이름표를 하나씩 달고 가세요.

이 나무에서 열리는 첫 열매로 담근 첫 번째 와인을 모두 함께 나눠 마시기로 해요.

” 이 제안에 그들은 와, 소리를 내면서 즐거워한다.

오늘 막대기에 불과한 나무를 심었지만 언젠가 여기서 나온 포도로 담근 술을 함께 마실 생각을 하니

 오늘의 농사와 노동이 삶의 축제가 된 것 같다. 인생에 낙이 생긴 기분이다.

나무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땅 속으로는 뿌리를 뻗고 하늘로 키를 키울 것이다.

생각해보면 술이란 이런 마법 같은 순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멍, 멍, 멍!”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다들 깜짝 놀란다. 휴식 시간이 너무 길었다.

엉덩이를 일으켜 목장갑을 끼고 모자를 쓴 뒤 곡괭이를 쥔다.

퍽, 퍽, 퍽. 곡괭이질 소리가 훨씬 더 안정적이다. 중참으로 마신 술의 힘인지,

 몸속에 숨었던 농부의 피가 잠을 깬 것인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거나 우리는 지금 인생에서 아름다운 봄의 한때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첨부파일 레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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