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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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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효모는 과일주의 영혼[포도나무 아래서]〈43〉
작성자 농업회사법인 작은알자스 주식회사 충주지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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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0-02-18 20:5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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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1년에 몇 번 만드세요? 한 달에 몇 병씩 만드세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일주는 1년에 한 번 만든다. 수확하는 그때를 놓치면 술을 담글 수 없다. 껍질에 붙은 효모로 발효하는 술은 과일 자체의 신선함이 중요하다. 야생 효모는 갓 수확했을 때 가장 많이 붙어있고 힘도 좋기 때문에 이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된다. 효모가 얼마나 반짝반짝 혈기 왕성하냐에 따라 술의 향과 맛이 달라진다. 껍질 효모로 와인을 만드는 내추럴 와인에서는 ‘효모는 과일주의 영혼’이라고 말을 할 정도다.


지난주 내내 사과 착즙을 했다. 양조장 1년의 일 중 가장 중요한 날이다. 이날을 망치면 1년 술도 망치게 된다. 착즙 날을 앞두고 레돔은 생명역동농법 달력에서 열매에게 좋은 날을 받아두고, 도와줄 사람들도 수소문한다. 사과는 겨울 과일이고 착즙 일도 늘 엄동설한에 이루어진다. 올해의 사과즙은 어떤 색깔이며 어떤 맛의 어떤 향을 품고 있을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날지 착즙을 앞둔 날은 긴장감마저 감돈다. 문제가 있었던 착즙기계도 손봤고 발효탱크들도 다 소독해서 깨끗이 씻어 두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올해도 미래의 와인 메이커 빨간 장화 총각이 내려왔다. 빨간 장화를 신고 빨간 고무장갑을 꼈다. 두꺼운 털옷을 입고 은색 앞치마를 두르고 모자를 눌러썼다. 세척 통에 찬물을 채우자 똑같은 차림으로 무장한 이웃 귀농 후배가 사과 궤짝을 들어 쏟아붓는다. 동그랗고 빨간 과일들이 사람 손 사이를 빠져나와 물속에서 ‘도르륵’ 굴러다니며 씻긴다. ‘사과야 황금 사과야. 길고긴 1년을 참 잘도 견디었구나. 너를 예쁘게 잘 씻어줄게.’ 어떤 것들은 기미를 덮어썼고 어떤 것들은 검은 반점이 있었고 어떤 것들은 새가 쪼아 먹어 못생긴 것들이 가득하지만 사과를 씻는 동안 우리는 못난이들 하나하나에게 사랑에 빠져버린다.



“이를 어째, 푹 젖어버렸어.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소매가 찬물로 어깨까지 푹 젖어버렸다. 안으로 들어가 난롯불에 옷과 장갑을 말리는 동안 레돔이 작년에 담근 시드르를 한 병 들고 온다. 거기에 서울 마르쉐 농부시장에서 사온, 청년들이 만든 치즈와 햄 안주가 곁들여졌다. 따뜻한 장작 난로에 몸을 녹이며 술이 한 잔씩 들어가자 다들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이런 순간이 너무 좋아요.” 빨간 장화 총각이 이렇게 말한다. 올해의 와인을 담그며 작년의 와인을 마시는 일, 양조장에서만 가능한 특권이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레돔이 짝짝 손뼉을 치며 우리를 밖으로 몰아낸다. 겨울 해가 너무 짧다. 난로 앞에서 노닥이다 보면 금세 어두워져 사과를 씻을 수 없다. 한쪽에서 사과를 씻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분쇄가 시작된다. 번쩍 궤짝을 들어 분쇄기에 사과를 집어넣는 순간 양조장은 콕 쏘는 달콤한 사과향이 진동한다. 분쇄된 사과는 착즙기에 한가득 채워져 똘똘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즙이 되어 천천히 발효탱크 안으로 흘러들어간다. 레돔은 첫 번째 즙을 유리잔에 받아 색깔을 보고 향을 맡아본다.


“음, 괜찮군. 신선하고 향긋해. 맛있는 술이 되겠어.” 그가 이렇게 말하며 일꾼들에게도 한 잔씩 맛보게 한다. 지금은 풋풋하고 건전한 사과즙이지만 언젠가는 인간의 심장을 따뜻하게 풀어줄 한 잔의 술이 되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한참 남았다. 겨울 동안 긴 발효의 시간을 거치고 탱크 갈이를 하고 아침저녁으로 효모 꽁무니를 따라다녀야 할 것이다. 효모의 기분이 나빠지면 술통을 다 망쳐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세심하고 다정하게 안부를 물어야 한다.


착즙하고 난 뒤의 사과찌꺼기는 마당 한구석에 쌓고 그 위에 낙엽 이불을 수북이 덮었다. 발효 통 속의 사과즙이 술이 되는 동안 그 찌꺼기는 마당에서 낙엽과 함께 잘 삭아서 내년에 다시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디 하나 놀고 있는 곳이 없는 양조장의 겨울이다. 이제 또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성탄절이 왔으니 일단 잘 먹고 잘 마셔야지.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첨부파일 98940784.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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