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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리뷰>이제 땅 파기 시작했습니다만
농업회사법인 작은알자스 주식회사 충주지점 (ip:) 평점 0점   작성일 2021-09-09 추천 추천하기 조회수 177
축허가가 떨어지고 땅에 기본 틀을 잡는 날이 다가오니 뭔가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닌가,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땅도 파기 전에 집이라는 커다란 물체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양조 기계들이 앉을 자리에 전기 설계나 수도, 하수의 위치를 제대로 잡은 것일까? 전기를 벽에 넣고 수도 라인을 노출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저장창고 창문을 뚫지 않는 것에 후회하지 않을까, 원료처리실과 발효실 배수구를 너무 길게 넣은 것은 아닐까. 남쪽으로 난 창을 좀 더 크게 해야 나중에 양조장을 못한다 하더라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저런 걱정들이 내 호흡을 딸리게 했다.


신이현 작가*신이현 작가는 충주에서 프랑스인 남편 레돔씨와 농사를 짓고 사과와인을 만들어 판매한다. 현재 와이너리를 건축중이다.



“설계변경을 하면 되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지으면서 생각해 보죠.” 시공사 선 소장님은 이렇게 쿨하게 말씀하신다. 이 한마디에 산소 호흡기를 댄 것처럼 갑자기 숨 쉬기가 편해진다. 건축가와 시공사, 건축주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퍼즐을 맞추듯 아름다운 집을 탄생시키는 이야기를 담은 책들을 보면 부럽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다. 다들 바쁘고 자기 문제는 자기가 풀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유명 건축가가 지은 집도 비가 새는 종류의 심각한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지은 집이 완벽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완공된 집은 내 아이를 대할 때의 자세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든 아이지만 썩 뛰어나지는 않다. 부모에게 상냥하지도 않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크게 내세울 것이 없다. 그렇지만 내 아이니까 사랑스럽다. 그냥 이 아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집도 그렇다. 시공 후의 불편함은 사는 사람이 고치면 된다. 이미 나의 집으로 태어났으니까, 이미 내 마음을 담았으니 사랑하고 보듬어주면 조금씩 자기만의 생명을 가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편안해졌다.

“어머, 이렇게 넓을 줄 몰랐어요.” 양조장 건물이 앉혀질 자리에 줄을 치며 틀을 잡는 날, 그 줄 안에 들어가니 그 공간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한 번도 대궐 같이 넓은 집을 원해본 적이 없었다. 집은 그 크기만큼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물건이다. 앞으로 고생길이 확 트인 기분이 들었다. 숨어있기 좋을 정도의 작은 집에 살기를 원했건만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건축주가 또 쓸데없는 회의에 빠지기도 전에 포클레인이 와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흙이 어찌나 새카만지 땅 속에 숨었던 칠흑같은 그믐밤을 불러낸 것만 같았다.

“이 땅은 흙이 좋아. 농사에 정말 좋은 흙이야. 그런데 이 좋은 흙이 있는 데서는 집을 짓고, 저 위에 돌밖에 없는 땅에는 농사를 지어. 왜 그랬어?” 포클레인이 땅을 파헤치자 동네 어르신이 오셔서 한마디 하신다. 양조장은 많은 기계들이 오고가니 도로에 붙어야 편리하고, 경치 좋은 높은 곳이 아니라 땅 속에 딱 붙어야 술이 잘 익는다는 것을, 포도나무는 기름진 땅보다 돌이 많은 땅에 어렵게 뿌리를 박아야 훗날 그 돌 속 미네랄 맛들이 포도송이에 맺힐 것이라는 것을.... 일일이 설명은 못하고 그냥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게 되었네요.” 하고 만다. 조금 있으니 온 동네 분들이 다 오셔서 웅성웅성 한마디씩 한다.

“흙을 몇 트럭 더 넣어서 땅을 돋아야지. 현재 너무 푹 꺼졌잖아.” “여기가 터가 좋아. 저 위에 서당이 있었지. 저 오른 쪽엔 절도 있었고. 원님이 항상 이쪽으로 해서 저 서당으로 갔단 말이야. 그래서 원통마을이라는 이름이 있지.” “우리 마을에 젊은이가 들어와서 너무 좋아.” 포클레인이 돌아가는 가운데 동네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왠지 웃음이 나고 낙관적인 기분이 든다. 적어도 이 마을에서 나는 젊은이로 통한다. 새댁이라고도 한다. 무슨 일을 못하랴 싶다. 어서 완성되어 잘 익은 술을 한잔씩 들이키며 양조장 포도밭 이야기와 동네 역사를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그런데 세상 일 마음대로 안 된다. 땅 파기 바쁘게 가을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파놓은 땅에 물이 출렁출렁 넘친다. 개구리가 뛰어다니고 물 방아깨비가 날아다닌다. 선 소장님은 겨울에 집 짓게 생겼다고 한숨을 푹 쉬신다. 산소 호흡기가 필요한 순간이지만 이렇게 말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언젠가 그치겠죠. 그냥 편하게 갈래요.”

출처 : 충청리뷰(http://www.ccrevie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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